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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의 트렌디라이프] ♬ 레코드 위로 시간은 돌고 돈다

  • 입력 2016-05-06 09:30:00
  • 수정 2016-05-06 09:30:00
뉴스래빗의 새 영상기획 '트렌디라이프'

바래지 않는 트렌드 '빈티지' 탐구
3. 시간 : 과거-미래 만나는 곳에 빈티지는 살고 있다


[편집자 주] 유행(트렌드)은 우리네 시대상입니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1994·1997'을 통해 우리는 세월 속에 묻힌 과거의 유행과 조우합니다. 이내 추억에 잠깁니다. 유행은 그렇게 돌고 돕니다. 다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고, 이내 또 사라집니다.

문화로 성장하는 유행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뉴스래빗의 새 기획 '트렌디라이프(Trendy Life)'는 한 철 유행이 아닌 삶 속에 뿌리내린 트렌드와 문화를 '장소', '사람', '시간' 세 주제로 나눠 영상뉴스로 전합니다.

그 첫번째 바래지않는 트렌드 '빈티지(Vintage)' 편의 마지막 이야기 빈티지한 '시간'을 소개합니다. 시간의 기억이 돌고 도는 레코드, LP를 통해서입니다.

과거는 지난 시간의 합(合)이다. 일분 일초, 매 현재의 시간이 켜켜이 싸여 세월로 흐른다. 쌓이는 먼지는 그 과거가 남긴 노화의 흔적이다. 먼지가 쌓일수록 바래지고 잊혀진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많은 것들이 명멸한다.

시간은 어디에나 빈틈없이 공격을 퍼붓는다. 부자에게나 거지에게나 똑같다. 사람과 추억과 물건이 나이들어 사라지게 하는 그 세월은 그래서 무정하다. 모든 존재는 유한해서 그 어떤 것도 노화와 시간을 이겨낼 수 없다. 늙지 않으려는, 잊혀지지 않으려는 우리는 그 세월과 시간을 덧없어 한다.

그러나 세월이 사람과 추억과 물건을 지켜나가는 시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먼지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사라지는 과거처럼, 먼지를 닦아내는 오늘의 시간이 쌓이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시 미래로 나아간다. 과거처럼 미래 역시 시간의 합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성스레 어루만지면 미래가 열린다. 살아 숨쉬는 과거가 다시 미래와 만나는 곳에, 그래서 '빈티지'는 살고 있다.

♬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서울특별시 마포구에는 아직도 레코드, LP판에 쌓인 먼지를 불고 닦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소장한 LP를 단순히 아날로그, 추억, 복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지나온 세월이 무색할만큼, 아니 지금 막 태어난 신상품처럼 죄다 윤기가 흐르고 광이 선명하다. 오히려 오래될수록 레코드라는 제품의 생명력과 상품성은 더 높아지는 듯 했다.

나이들지 않는 청춘(靑春) 같았다. 만물(萬物)의 푸른 봄철을 뜻하는 청춘. 봄여름가을겨울 세월의 턴테이블 위에서 수백, 수천바퀴 굴렀지만 이 레코드가 갓 태어난 봄마냥 활기가 넘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시트레코즈, 어루만진 시간이 애정의 시간

모든 취미가 그렇듯 시작은 애정이다. 레코드를 사기 위해, 듣기 위해 할애한 시간은 애정의 시간이다. 1분에 33번 회전하는 레코드 한 장을 다 듣기 위해선 40여 분이 소요된다. 빨리 감거나 건너뛰거나 돌리기도 어렵다. 시간에 쫒기고, 트렌드를 쫒는 사람과 레코드는 잘 맞지 않다. 평일 오후 서울 서교동 골목길 어귀에 위치한 작은 레코드 가게를 채우는 건 판을 사갈 손님이 아니라 레코드 그 자체인 음악이다.

"매년 '레코드 시장의 부활, 아날로그의 귀환'이라고 떠들어요. 미국이나 일본은 그렇죠. 국내는 아니에요."

3년째 시트 레코드를 운영 중인 유지환 대표(34)는 매장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다들 사는 게 바쁘니 레코드 들을 여유가 없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은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 여유도 없잖아요. 그래서 젊은 단골들 보면 힘이 나곤 합니다."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전세계 음악을 다 들을 수 있는 요즘, 레코드에 쏟는 시간은 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턴테이블을 사고, 발품 팔아 발굴한 레코드를 올리는 이 과정까지 수일 혹은 수주일이 걸릴 수도 있다. 유튜브 클릭 한번이면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다. 레코드를 비로소 턴테이블에 올리는 일은 노력없이 하기 힘들다.

인터뷰 중 매장을 찾은 대학생(정문구, 28세)에게 레코드를 사는 이유를 물었다.

"원하는 앨범을 사기 위해서는 발품도 팔아야 되고, 관리하는데도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요. 근데 그래서 애착이 생겨요. 그 과정을 즐기는 거죠."

공들이고 어루만지는 시간은 애정의 깊이와 비례한다. 첫사랑에 잠 못이루던 그 모든 설레임처럼 말이다.

♬ 김밥레코즈, 오래될수록 새롭다

새것만이 새롭지는 않다. 누군가의 추억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움일 수 있다. 지금 레코드가 그렇다.

서교동에 위치한 김밥레코즈에서 일하는 작곡가 000를 만났다.

"젊은 고객들이 주 고객들이에요. 레코드 콜렉터(수집가)들 뿐 아니라 처음 레코드를 접하는 분들도 찾아오세요. 가게 앞을 지나가다 예쁜 앨범 커버를 보고 들어오기도 해요. 그 분들한테는 플라스틱판에서 소리가 나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에요.”

아이러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형(無形)의 디지털 파일로 음악을 접했던 세대에게, 유형(有形)의 레코드는 음악을 듣고 소장하는 새로운 방법이 됐다. 스마트폰 음악이 주지 못한 경험을 레코드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과거에만 멈춰있지 않을 듯한 레코드 시장도 다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외형과 커버 디자인이 매력적인 레코드판은 젊은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레코드를 찾는 젊은이가 늘면서 요즘 뮤지션들도 다시 LP를 내고 있다.

새로이 발매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울려퍼진다. 오래전 물건에 담긴 새로운 음악들은 레코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버리기에 충분하다.

♬ 소리헤다, 과거가 현재를 채운다

최근 레코드로 새 앨범을 발매한 음악 프로듀서 ‘소리헤다(최광규,33세)'를 우연히 김밥레코즈 앞에서 만났다. 레코드 수집가 이기도 한 그가 생각하는 레코드를 물었다.

"레코드 앨범에는 과거의 아티스트가 음반을 완성하기 위해 공들인 모든 시간이 담겨있다 믿어요. 그래서 음악을 들을 때 당시 아티스트의 시간이 현재 저의 시간을 채우는 거예요. 레코드는 제게 그런 이미지입니다."

그에게 레코드란 좋아하는 아티스트와의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이다. 그가 레코드로 앨범을 낸 이유이기도 하다. 레코드로 앨범을 발매하기 위한 고충을 잘 아는 그였기에 국내 레코드 시장에 대한 아쉬움도 진했다.

"실제 미국 같은 경우 레코드 산업이 매년 증가하고 있어요. 옆 나라 일본만 해도 레코드판을 사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어요. 국내에도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레코드를 파는 가게들이 많으니 와서 편하게 레코드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감상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레코드는 아직 소수의 전유물일지도 모른다. 레코드가 음악을 듣는 매체로서 과거 전성기와 같은 볼륨을 갖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CD와 MP3를 거쳐 스트리밍의 시대에도 레코드는 아직까지 돌아가고 있다. 찾는 사람이 있는 한 돌아가는 레코드에는 시간이 흐른다.

레코드판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의 매개체다. '기록하다(record)'라는 뜻의 이름처럼 애시당초 레코드는 소리를 녹음하고, 저장한 최초의 매체였다. 현대 레코드판의 시초는 1887년 독일의 베를리너가 만든 원반녹음(그래머폰)이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 레코드는 입체음향을 선사하는 스테레오판으로 진화했다. 100년 전 레코드판 위에 새겨진 사람들의 기록은 오늘도 재생된다.

'길게 재생하다(Long Playing record)'라는 LP의 뜻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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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김민성 기자, 연구= 이재근 한경닷컴 기자 rot011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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